鄭桓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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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桓範(韓語:정환범、1903年—1977年7月14日),是韓國獨立運動家、外交官。

生平[编辑]

1919年三一運動時,他應斯科菲爾德博士的要求,全世界報導了3.1運動期間的大屠殺現場。後流亡中國。二戰結束後,他於1946年1月從上海回到朝鮮,在美國軍政府任職,並表示將根據政治和經濟學來致力於重建經濟。[1] 建國後的1948年11月,擔任首位韓國駐中華民國大使。[2]

參考[编辑]

  1. ^ 經濟學을 專攻한 鄭桓範氏卅三年만에 歸國. 東亞日報. 1946-02-07. 三十三년동안 구라파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음양으로 조선해방에 만흔 기여를 하든 鄭桓範 박사가 이지음 그리운 고향에 도라왓다 씨는 충북 淸州 출생으로 열두살 때 고국을 떠나 만주 중국을 거처 구미 각국에서 공부를 하엿는데 론돈대학 주네부대학 켄부리치대학에서 경제학 정치학을 전공하고 몃해전에 중국으로 건너와 滬江대학 성요한대학 震旦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은 일도 잇고 최근은 중경에 잇다가 지난 달 三十일 上海에서 도라온 것이다 저서로는 “무역과 경제계의 장래” “시장 연구” 등을 영문으로 런던에서 발간하여 구리과학계에 큰 이채를 던지엇섯다 씨는 방금 조경무 국장 댁에 유하고 잇는데 오랫동안 외국생활을 하엿슴에도 유창한 우리말로 다음과 같이 감상을 말한다. 나는 오랫동안 외국에만 잇서 조선의 사정을 잘 모르지만 조선을 이저본 일은 업습니다 중국에 잇슬 때에는 정치 경제에 대한 것을 학교에서 강의한 일이 잇고 임시정부와는 즉접 관계는 없었서도 요인들과는 각별한 친분과 연락을 가지고 일해왓습니다 아포로는 조선의 경제 재건을 위하야 미력을 바쳐 건국에 이바지하고저 합니다 ) 
  2. ^ 對中通商을 交涉. 東亞日報. 1948-11-24. 大韓民國의 駐中特使로 南京에 赴任하게 될 鄭桓範 博士는 隨員三人을 帶同하고 來二七日 空給로 金浦空港을 出하發리라는 바 鄭特使의 駐中最初任務는 中國과의 通商協定締結의 交涉과 在中國교財産問題를 協議解決하는 데에 있다고 한다.